▒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 ▒ 지정연월일 : 1972년 8월 30일 ▒ 시 대 : 조선시대, 18세기 ▒ 규모·양식 : 1동(건평 12평, 정면 3칸, 측면 2칸) 및 묘역(18,736 평) ▒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 소 유 자 : 사단법인 청권사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91-1 청권사부묘소는 조선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 1486)과 그 부인인 예성부부인( 城府夫人) 정씨(鄭氏)의 묘소와 이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효령대군의 이름은 보(補)이나 초명은 호(祜)이며,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 시호(諡號)는 정효(靖孝)인데 양녕대군(讓寧大君)ㆍ세종과 더불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태종 7년에 효령군에 봉해지고 해주 정씨를 맞아 혼인하였으며 태종 12년에 효령대군으로 진봉(進封)되어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올랐다. 효령대군은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태종을 따라 항상 사냥터에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동생 세종과는 우애가 깊어 밤늦도록 국정 전반에 걸쳐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특히 불교에 독실하여 많은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또 세조 10년(1464) 원각사(圓覺寺) 창건에 조성도감(造成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공사를 감독하였고, 원각경(圓覺經)을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성종 17년(1486) 5월 11일 세상을 떠났으며,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효령대군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정씨는 의정부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이며 태조 3년(1394) 태생이다. 처음 숙의옹주(淑懿翁主)에 봉해진 후, 세종 때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고 후에 다시 예성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부부인의 덕행이 당대 대부의 아내 중 으뜸이었으며 왕실에서 빈(嬪)을 맞이하거나 대군ㆍ공주의 혼례를 할 때면 으레 부부인으로 하여금 주관토록 하였다. 청권사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으로 영조와 정조 연간에 중건 보수되었고, 1980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청권사는 영조 12년(1736) 효령대군의 여러 자손들의 요청으로 그 해 8월 경기 감영에서 효령대군의 사당을 짓기로 하였으며, 이듬해인 영조 13년 4월 23일에 청권사의 상량식을 거행함으로써 건립되었던 것이다. 그 후 정조 13년(1789) 12월 29일에 '청권사(淸權祠)'란 편액이 걸리게 되었는데, 청권(淸權)이란 명칭은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의 ‘처신한 것이 청도함에 맞았고, 스스로 폐한 것은 권도함에 맞았다’[신중청(身中淸) 폐중권(廢中權)]는 이야기에서 연유한 말이다. 사당 안에는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에 보관되어 오던 대군의 초상화를 베껴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조 때에는 제식(祭式)·제품(祭品)을 관급(官給)으로 하고 후손을 등용하였으며, <어제사기(御製祠記)>를 보낸 사실 등이 《정조실록》에도 나타나 있다. 사당 뒤의 묘소에는 효령대군과 부인 정씨의 묘가 나란히 있고, 그 아래 대군의 제7대ㆍ제8대 종손의 묘소라 하는 2기의 후손 묘가 있다. 대군과 부인 정씨의 무덤 앞에는 비석과 혼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두 무덤보다 한 단 아래 한가운데에는 나지막한 장명등이 있다. 그리고 좌우로 문인석이 2구씩 세워져 있다. 이러한 석물 양식은 양녕대군 묘소의 것과 함께 조선 초기의 석물로써 당시 대군묘의 제도와 규모를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